주일설교
20191215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이사야 9:6-7: Mighty God, Jesus)
할렐루야! 우리는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뉴스를 아침에 배달되는 조간신문이나 저녁 9시 TV뉴스를 통하여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종이신문이나 TV뉴스가 예전처럼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마트 폰을 통하여 하루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뉴스를 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정신없이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뉴스들이 다 좋은 소식이라면 얼마나 세상이 살 맛 나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나쁜 뉴스들입니다. 즉 전쟁과 분열과 증오와 불안의 뉴스들 뿐 입니다. 그래서 뉴스를 전하는 기자들의 표정을 보면, 하나같이 어둡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기자의 표정은 얼마나 밝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저는 그 기자의 표정만큼이나 세상은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도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기자보다도 밝고 아름다운 표정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러 가는 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빌립입니다. 빌립의 표정이 그토록 밝고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가 전하려고 하는 좋은 소식이 그냥 좋은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며칠 동안 소수의 사람에게만 기쁨과 만족을 주는 그런 종류의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전하려는 소식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는 가장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 가장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바로 나사렛에서 온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빌립은 나사렛에서 온 예수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그가 바로 구약의 모세와 더불어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려오던 구세주가 드디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분을 직접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이러한 소식을 가장 먼저 나다나엘에게 전하기 위하여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표정은 빌립의 표정과 정반대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어둡고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다윗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는 당연히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도 소유하지 못하였던 막강한 권세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로마군대를 한 방에 몰아내 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렛 촌 동네 출신이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말에 모든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나다나엘이 했던 그 말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전혀 낯설거나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대형 성탄트리 옆을 지나가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 중에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마음으로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참여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빌립은 나다나엘을 향하여 어떻게 말하였습니까? ‘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낙심한 세상을 향하여, 실망한 성도들을 향하여 와서 보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약 7백여 년 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의 이름 다섯 가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장차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인지를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생생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묘자입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정녀 탄생부터 십자가의 부활까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도 놀랍게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천국에서 눈을 뜨고 와 할 때까지 계속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은 모사입니다. 영어로는 카운슬러인데요, 상담자 또는 조언자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친히 지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 상담자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지혜가 아니라 완전한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만약에 그런 지혜가 없는 분이라면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 번째 이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 번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셋째: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라고해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에 나오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같은 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적인 속성을 예수님도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거룩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거룩하시고,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것처럼, 예수님도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론에서 말씀드린 나다나엘은 결국 확신에 찬 빌립의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9에 보면, 나다나엘은 그토록 무시하던 예수님 앞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마다, ‘만나서 반갑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 앞에서 깜짝 놀랐던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이 보다 더 큰 일도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실 때에 마침 그곳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라고 하였고, 그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 앞에 귀신들이 순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마가복음 4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실 때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물결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시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급히 깨웠을 때에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하여졌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바람과 바다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건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다가 잔잔하여 진후에 예수님에게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귀신이나 풍랑까지도 순종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의지하였을 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명령하였을 때에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순종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선포할 때, 우리의 문제가 우리 앞에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 예수님의 다섯 가지의 이름 중 세 번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탄의 소식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면 모든 피조물이 순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탄의 소식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함으로 문제 앞에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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