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200816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열두 제자 이야기, 마태”
(마태복음 9:9-13)
할렐루야! 어제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지 7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개봉된 ‘암살’이라는 영화를 통하여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전지현이라는 여배우가 독립군 소속 저격수로 나오는 이 영화에서 당시 우리민족이 가장 증오하고 경멸하였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 형사나 일본인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같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친일파였는데요, 그들 가운데 밀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일본 경찰의 앞장이가 되어서 독립군을 팔아먹으면서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창기와 더불어 회당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관리나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유대인들이었는데요, 구체적으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같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는 세금을 거두어들일 때에 통관세와 통과세, 그리고 어업세는 로마관리들이 직접 거두어들이지 않고 유대인들을 세리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세리들은 로마에서 정한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거두어서 납부만 하면, 나머지는 얼마를 거두던지 착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당연히 같은 민족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리들 가운데 한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먼저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가나 지나가시는 중이었다.’고 했는데요, 여기서 그곳이란 갈릴리의 중심지인 가버나움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가버나움 지역은 북쪽에 있는 다메섹과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멀리 애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과 물자들이 통과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세관에 앉아서 열심히 세금을 거두고 있던 마태를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서 빌립을 제자로 부르실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를 따르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셨을 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모든 사람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일제 시대에 친일파를 독립군 장교로 임명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더 놀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즉시 자리에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에 세리들이 민족의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던 이유는 경제적인 유익이 엄청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아무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다고 할지라도, 쳐다보지도 않을 줄 알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유명한 장군이나 학자출신이 아니라 대부분이 어부출신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하신 것처럼, ‘고운 모양과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즉석에서 자신이 움켜쥐고 있던 모든 특권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의 모습을 예상하였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마태가 땅을 치면서 후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땅을 치면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때 서울에 조그마한 아파트라고 한 채를 사 둘걸, 그때 신 공항이 들어서는 군위와 의성에 자갈밭 5천 평을 팔지 말 걸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마태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 못들은 척하면서 세관에 계속 앉아 있을 걸 하면서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땅을 치면서 후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을 둘러 볼 때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마태를 보면서 그때 부르지 말 걸 하면서 후회하실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저와 여러분들도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다는 말씀을 때마다 혹시 괜히 예수님을 따라갔다가 평생 후회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도 괜히 이렇게 부족한 사람을 불렀다고 후회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자의 길과 무리의 길 앞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합니까? 먼저 10절을 보시기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기고 결심한 마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땅을 치면서 후회한 것이 아니라 축하잔치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회원이 등록을 하면 누가 잔치를 준비합니까? 당연히 기존의 회원들이 환영잔치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신입 제자를 환영하면서 잔치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마태가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스스로를 축하하는 자축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자축하는 잔치를 베푼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그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래 마태의 이름은 마태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마태가 세관에서 부름을 받을 때에 이름은 레위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이름을 마태로 바꾸었는데요, 마태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은 당연히 물질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위한 축하잔치를 베풀었는데요, 그 자리에 누구를 초대합니까?
요즘은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가족들끼리 간단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마태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그 자리에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마태가 동네 유지나 저명인사를 초대하지 않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대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가장 귀한 선물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창한 잔치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게 된 마태는 어떤 일을 감당하였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할 때, 평생 세금액수를 적던 더러운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더러운 손으로 거룩한 성경을 썼습니다. 어떤 성경입니까?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사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을 ‘송아지복음’이라고 불렀고,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은 종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반면에, 마태복음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족보상으로는 다윗 왕의 혈통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두 번째 특징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을 위하여 쓴 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태가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를 쓰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할 정도로 마음이 완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세리 출신이었던 마태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태의 손을 통하여 마태복음이라는 귀한 열매를 이 땅에 남기게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태를 부르신 이후에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으셨는 줄 압니다.
이러한 마태를 볼 때,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마태가 세리의 자리와 물질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순간부터 그의 삶은 기쁨과 열매로 가득 찼습니다. 즉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농부처럼 씨를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75년 전 우리 민족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던 해방은 저절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윤동주, 유관순, 윤봉길, 안중근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치열한 전투에서 고귀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릴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워싱턴 디시에 가면 한국전쟁 참전비가 있습니다. 그곳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우리의 75년 해방의 기쁨도 공짜가 아니었고, 한국전쟁에서의 승리도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도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동산교회 부흥도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94장,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라는 고백대로 버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귀한 열매들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버렸습니까? 헛된 것들을 손에 쥐고서 머뭇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소중한 것을 버림으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