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191201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 기묘자, 예수”
(이사야 9:6-7)
박 영찬 목사
할렐루야! 지난 금요기도회 후에 우리교회 성탄트리 점등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는 시내 동성로에서 대구시장님을 비롯한 천 여 명의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대형트리 점등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탄트리에 불이 들어오면 목석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모두들 와 하고 감탄을 하면서 손벽을 칩니다. 그리고 흥겹게 신나는 캐럴을 따라 부르기도 하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서 카톡에 올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불이 들어오는 그 순간, 우중충했던 트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탄트리에 불이 들어오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기입니다. 만약에 전기가 없다면, 아무리 트리를 높이 세우고 전구를 많이 달고 장식물로 꾸민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게 바뀌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를 정도로 바뀌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돈도 있어야 하고, 건강도 있어야 합니다. 좋은 친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이 좋아도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죄의 문제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마치 암 덩어리와 같습니다. 우리 몸에 암을 방치해두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우리의 생명을 삼키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죄도 그대로 방치해 두면 나중에 무서운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합니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은혜가 바로 죄 사함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죽었던 숫양을 통하여서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면, 한쪽 벽에 구약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의 얼굴이 모두 반대편 벽에 그려져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바로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한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무려 700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지를 자세히 말씀하였습니다.
먼저 이사야 7장에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이사야 9장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 다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기묘자이고, 두 번째 이름은 모사이고, 세 번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네 번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고, 다섯 번째 이름은 평강의 왕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그 이름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기묘자, 예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6절에 보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했는데요, 여기서 한 아기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기묘자라고 할 때에 기묘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보면, ‘생김새 따위가 이상하고 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에 보면, “Wonder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놀랍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영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 흥민 선수가 중거리 슛을 날려서 멋진 골을 넣으면 한 마디로 ‘원더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음악회에서 조 수미씨와 같은 성악가가 노래가 끝이 나면 모든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면서 역시 ‘원더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이 기묘자라고 할 때의 그 원더풀은 다른 사람의 실력이나 기량보다 조금 더 뛰어난 분이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다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놀라운 삶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출생에 있어서 놀라운 기묘자입니다(첫째: 놀라운 출생).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인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가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하였다고 했습니까?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했던 것이 아니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다는 뜻인데요, 창세기 18장에 보면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서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90세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씀대로 사라가 임신을 하였을 때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렇다면 한 번도 남자를 가까이 해 본적이 없는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도 놀라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자연의 법칙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주의 여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서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고백할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사역에 있어서 놀라운 기묘자입니다(둘째: 놀라운 사역). 사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과 6장, 그리고 7장에 나오는 산상보훈을 통하여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 무리들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것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신적인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서 가르치셨을 때에도 그들은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런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을 때에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냐.’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지붕에서 침상 째로 달아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도,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였을 때에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도,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이름이 놀라운 기묘자라고 불렀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죽음에 있어서 놀라운 기묘자입니다(셋째: 놀라운 죽음).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습이 다른 죄인의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바라본 사람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의 영광이 동일하게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이름을 놀라운 기묘자라고 불렀습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놀라운 기묘자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면 반드시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떠나가고, 절망이 떠나가고, 심지어 죽음의 두려움조차도 떠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내 모든 짐을 벗겨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될 때 놀라운 일들로 채워질 줄 믿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이번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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