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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모사,예수 " 설교
2019-12-08 14:42:55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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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8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모사, 예수(Counselor, Jesus)”

(이사야 9:6-7)

 

 

할렐루야! 우리가 매년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는 115기쁘다 구주 오셨네.’인 것 같습니다. 1절 가사를 보면(가사 자막), 누가 예수님을 맞이해야 하고, 누가 일어나야 하고,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 맞이해야 합니까? 만 백성이 맞이해야 합니다. 누가 일어나야 합니까? 온 교회가 다 일어나야 합니다. 누가 찬양을 해야 합니까? 다 찬양하여야 합니다.

 

영어가사를 보면,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까지도 기뻐하고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다 기쁨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가뭄을 해결하는 단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농부에게는 당연히 기쁜 소식이지만, 소풍을 준비하는 아이에게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픈 소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아파트 시세가 올랐다는 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2천여 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왜 일부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다 기뻐하고 다 찬양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약 7백여 년 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지를 자세하게 예언하였습니다.

 

먼저 7장에 보면, 예수님은 동정녀를 통하여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53장에서는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 다섯 가지를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영화의 예고편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름이 무엇입니까? 기묘자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묘자는 생김새 따위가 이상야릇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놀라움또는 ‘Wonderful’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이 기묘자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해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세 가지 면에서 놀라운 기묘자였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태어나셨기 때문에 놀라운 분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산상보훈과 같은 말씀과 그리고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놀라운 분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놀라운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을 놀라운 기묘자라고 부른 더 큰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도 놀랍게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임 채옥 성도의 아기, 이민의 회복).

 

이러한 놀라운 변화의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천국에서 눈을 뜨고서 와하고 함성을 지를 때까지 계속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놀라움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이름은 모사입니다. 아마도 성도님들에게는 예수님의 다섯 가지 이름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도 번역이 적절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어로 모사는 요에츠인데요, 영어로는 카운셀러입니다. 즉 상담자, 조언자, 가르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요에츠, 상담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즉위 하였을 때에 백성들이 찾아와서 솔로몬 시대에 메운 멍에를 좀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르호보암을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은 대답인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솔로몬을 섬겼던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함께 자라난 어린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멍에를 가볍게 해 주어야 한다는 노인들의 조언을 버리고, 멍에를 더 무겁게 해야 한다는 친구들의 조언을 따르게 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라가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누어져서, 동족끼리 싸우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르호보암처럼 우리가 아무리 고민하고 연구하여도 문제의 정답을 알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상담자나 조언자를 찾아갑니다. 물론 그들을 통하여 많은 도움을 얻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된 조언으로 인하여 두고두고 후회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가 찾아올 때마다 오답이 아니라, 정답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상담자가 곁에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 주변에 상담자는 많이 있습니다만, 내가 간절히 찾고 있는 그 문제의 정답을 가르쳐 주는 상담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혜는 완전한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상담자라고 할지라도 사람의 지혜는 부족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지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줄 믿습니다.

 

실제로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유명한 자동차 회사의 정비사가 차를 몰고 출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 고장이 나서 길 한복판에서 멈추어 서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정비사는 자신 있게 자동차를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에 멋진 차를 타고 가던 한 노인이 다가와서는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정비사는 얼마나 속으로 가소로웠겠습니까? 왜냐하면 디트로이트에서 가장 유능한 자신도 못 고치는 차를 노인이 절대로 고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신사가 부속품 몇 개를 만지자 차의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때 신자가 명함을 한 장 주고 사라졌는데 그 명함에는 헨리 포드라는 적혀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바로 그 차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인생의 문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장 난 자동차의 문제도 어렵지만, 고장 난 인생의 문제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구동성으로 인생살이가 너무나 어렵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혼란스럽다들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디자인하시고, 지으셨기 때문에 정답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는데,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이 없이 된 것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하나님과 함께 우리를 창조하는 일에 참여 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모사라, 상담자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16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란 성령님을 의미하는데요, 성령님을 영어로 another counselor 즉 또 다른 상담자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리지널 상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와 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바로 영적인 목마름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돈의 목마름이나 명예의 목마름은 이미 해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목마름 문제 즉 영생의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신 다음에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고난을 보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면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심으로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문제의 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쉼을 주실 줄 믿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은 모사였습니다. 즉 상담자와 조언자와 가르치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상담자와 같이 불완전한 지혜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완전한 지혜로 도와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69장에 보면,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주께 고함 없으므로 복을 얻지 못하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상담자 되신 예수님, 그리고 친구 되신 예수님 앞으로 기쁨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소중한 답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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