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191222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영존하시는 아버지, 예수님”
(이사야 9:6-7, Everlasting Father, Jesus)
할렐루야! 요즘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사람은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박항서 축구감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박항서 감독은 감독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에 취임한 이후로 여러 국제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60년 만에 동남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에 히딩크 감독 못지않는 인기를 누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항서 감독이 짧은 기간 동안에 최약체팀을 최강팀으로 만든 비결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파파리더십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아빠 리더십을 가지고 팀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는 경기가 끝난 이후에 선수들의 다리를 아버지처럼 손수 마사지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기에서 패하였을 때에는 선수들을 책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선을 다했으니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아버지처럼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도 귀하지만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 ‘나의 아버지는 내가’라는 시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 일부를 소개해 드리면,
‘네 살 때, 아버지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는 많은 걸 알고 계셨다. 스물한 살 때, 아버지는 구제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졌다. 마흔 살 때,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쉰 살 때, 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계셔서 이 모든 걸 말씀 드릴 수 있으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라는 시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파렴치한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자식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이 자식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헌신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에 이런 아버지가 항상 곁에 서 계신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땅의 아버지들 가운데 영원토록 자식들 곁에 서서 도와줄 수 있는 아버지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좋은 소식을 전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그 좋은 소식은 며칠 동안 소수의 사람만 기쁘게 하는 그런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식은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는 다섯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묘자입니다. 놀람이라는 뜻인데요,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 놀라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까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산상보훈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름은 모사입니다. 상담자 또는 조언자라는 뜻인데요, 예수님은 세상 상담자처럼 불완전한 지혜가 아니라 언제나 완전한 지혜의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세 번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과 권능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특히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절망과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어떤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이름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 이름이 무엇입니까?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이사야 선지지가 말씀한 예수님의 다섯 가지의 이름 중 가장 어색한 이름이 이 네 번째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박항서 감독이 실제로는 감독이지만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세 가지 면에 있어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 점에서 아버지이십니다(첫째: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요즘 아이들은 아버지를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오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했을 때 무서운 얼굴로 혼을 내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는 자식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생명을 주는 존재입니다. 즉 아버지가 없으면 자식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송강 정철은 그의 시조에서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16에 보면, 죄인인 우리가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어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5:21에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용납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아버지이십니다(둘째: 용납하시는 분).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들의 허물과 잘못을 추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회개하면서 돌아온 탕자에게 먼저 달려가서 안아주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찾아가신 곳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맹세를 하였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겁한 제자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이놈들.’이 아니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시면서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고 있던 갈릴리 호수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세 번씩이나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목자의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한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책망하거나 물리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용납하시고, 영원히 용서해 주시는 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는 대신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친히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언제나 참소하는 사탄 앞에 당당히 고개를 들게 하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다는 점에서 아버지이십니다(셋째: 긍휼히 여겨주시는 분). 시편 103편 13절에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 중에는 돈이 없는 아버지도 있고, 건강이 없는 아버지도 있지만 자식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대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나병환자도 부정하지만, 나병환자를 만지는 자도 부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얼마든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실 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를 만지셨던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병든 몸과 영혼도 불쌍히 여기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몸과 영혼을 능력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병든 손 내밀어라.’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예수님의 네 번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용납하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앞에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