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200301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 영상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3”
(로마서 9:1-5)
박 영찬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쓴 글에 보면 ‘청어를 잡는 어부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어부들의 주된 관심은 영국의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어떻게 하면 살아 있는 상태로 런던까지 실어 나르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팔팔하게 살아있는 청어라고 할지라도 런던에 도착해서 보면 거의 다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어부는 살아있는 상태로 실어 와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그 어부에게는 한 가지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기 통에 청어와 함께 청어의 천적인 메기 한 마리를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두세 마리의 청어는 메기에게 잡아먹히겠지만, 나머지 수 백 마리의 청어는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아주 싱싱한 상태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어부는 청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앞에 한숨만 푹푹 쉰 것이 아니었습니다. 힘없이 무릎을 꿇지도 않았습니다. 메기 한 마리를 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기 때문에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저항의 기쁨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시지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오늘이 몇 일인지 무슨 요일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요, 오늘이 바로 삼일절입니다. 올해가 1919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을 한지 10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다음에 혹독한 식민지를 통치를 통하여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약탈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 우리 민족은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울 탑골공원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저항을 하였습니다. 사실 일본 경찰의 총칼 앞에서 저항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 민족이 그 위험하고 두려운 저항의 길을 택하지 않고, 쉽고 편한 굴복의 길을 택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대구경북 지역에 코로나19에 감염된 확신자가 벌써 이천 명이 넘는 상황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만, 무릎을 꿇지 않고 모든 시민이 하나된 마음으로 저항한다면 반드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가정에서 영상으로 드리는 것도 바이러스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애굽의 절대 권력자 바로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풀무불과 사자굴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믿음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에스더 왕비도 하만의 계획 앞에 굴복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저항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현실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성경에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도 예외가 아닙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무엇이 있다고 고백했습니까? 먼저 ‘큰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 근심이란 그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육체적인 고통이 찾아오면 진통제를 먹으면 대부분은 진정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진통제를 먹어도 고통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의 마음이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옥중에서도 슬퍼하지 않고 기쁨으로 충만하였던 그 사도바울이 이처럼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제가 봉독). 지금 사도바울은 자신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아마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불과 2주일 전처럼,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봉사하고, 전도회끼리 모여서 교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매일 텅빈 예배당과 부서실을 보면서, 그때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시편 137편에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 울었도다.’고 했습니다. 시편기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것도 슬픈 일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슬펐던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이 저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우리도 함께 동산교회로 돌아올 날이 속히 올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라면, 사도바울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하셨고, 수많은 이적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2:3에 보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원을 그냥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큰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귀한 구원의 복음을 누가 유대인들에게 전하여 주었습니까? 하늘의 천사가 전하여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전하여 주신 복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귀한 구원을 등한히 여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보응하시는데, 무서운 심판으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후에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물론 마음이 찔려서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때마다 가장 먼저 박해를 한 것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완악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면서,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 것 같습니까? 유대인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민족, 목이 곧은 민족,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은 이러한 상황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저항을 하였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저항하였습니까?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하면서 기도로 저항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모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늦게 내려오는 것을 보고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면서 경배하였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이런 모습을 본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판을 산 아래에 던져서 깨뜨렸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포기할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 앞에 무릎을 꿇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기도로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데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기록하신 책은 곧 생명책입니다. 결국 모세는 영원한 생명을 내걸고서 저항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도 보면,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길을 떠납니다. 그때에 가족들은 크리스천을 무시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천로역정 2권에 보면, 크리스천의 아내와 아이들도 주인공을 따라서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아내는 자신이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남편의 눈물을 병에 모아 두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저항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부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는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에 우리민족은 일제에 대하여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하여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이러스보다도 더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 민족과 가족의 구원입니다.
우리 민족 가운데, 우리 가족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있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습니까? 혹시 이러한 상황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있지는 않습니까?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바울처럼 기도로 저항하시가 바랍니다. 참된 사랑으로 저항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515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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