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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울 8
2020-04-05 17:39:02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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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울 8”

(고린도후서 11:23-33)

 

박 영찬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폴란드에 가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무려 4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던 끔찍한 수용소가 있습니다. 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19417월 어느 날, 그 수용소 소장이 모든 사람들을 운동장 한가운데 집합시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감자 중 한 명이 탈출하였데요, 한 명이 탈출할 때마다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열 명을 뽑아서 굶겨 죽이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용소 소장이 임의로 ‘7’ ‘125하고 열 명의 수감번호를 부르면, 그 사람들은 아사감방으로 보내어져서 굶어 죽는 순간까지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날도 수용소 소장이 열 사람의 번호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번호가 불릴 때마다 유대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하였겠습니까? 그들은 말 그대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번호가 불리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드디어 마지막 열 번째 사람의 번호가 불려 졌습니다. 그 번호의 주인은 가조니체크라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자신의 번호가 불려 지는 순간, ‘다시는 내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없다니하면서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시지요? 물론 불쌍하다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끝까지 내 번호가 불려 지지 않아서 너무나 다행이라는 안도의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콜베라는 사람이 수용소 소장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울고 있는 가조니체크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을 대신하여 내가 아사감방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고, 나이도 많아서 쓸모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소장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보다도 그 사람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장의 허락으로 콜베라는 사람은 아사감방에서 고통스럽게 굶어죽었고, 가조니체크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에도 보면,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입니다. 먼저 30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자랑합니까? 잘 생긴 외모를 자랑하거나 좋은 아파트를 자랑합니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벌금까지 내면서 손자를 자랑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활동할 당시에 거짓 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인이라는 혈통을 자랑하였고, 누구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는 학식을 자랑하였고, 말을 청산유수와 같이 잘한다는 언변술을 자랑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인정받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엇을 자랑하였습니까? 빌립보서 3장을 보면, 사도바울도 인간적으로 볼 때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남들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즉 사람들 앞에서 철저하게 감추고 싶은 것들을 도리어 자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자랑하고 싶었던 약한 것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첫 번째는 옥에 갇힌 일입니다. (첫째: 옥에 갇힌 일)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첫 번째로 방문한 성읍은 빌립보 성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로 인하여 사도바울과 실라은 어떻게 됩니까?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은 차꼬에 채워졌다고 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을 기록하기 전까지 옥에 갇혔다는 기록은 빌립보 사건 한 곳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에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거짓교사들보다도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더 많이 하였다는 것은 지겨울 정도로 많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수 없이 많이 감옥에 갇혔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의 자랑은 매 맞음이었습니다. (둘째: 매 맞은 일)신명기 25장에 보면, 죄인에게 매를 때릴 경우에 형량에 따라서 최고 사십 대까지만 때릴 수 있고, 그 이상 때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유대인들은 최고로 많이 때릴 경우, 사십대가 아니라 사십에 하나를 감한 39대를 때렸습니다. 왜냐하면 매질을 하다 보면 숫자가 헷갈려서 본의 아니게 41대를 때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한 대를 감하고 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서 대부분의 죄인들은 39대를 맞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3절 하반절에 보면,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유대인에게 이러한 매를 맞았다는 기록이 단 한곳에도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5절에 보면, 세 번이나 태장으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태장은 로마인들이 노예나 이방인을 다스리기 위하여 고안한 매질인데요, 그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나와서 역시 태장을 맞다가 죽는 사람들이 허다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 얼마나 끔직한 기억입니까? 그런데 그는 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도바울의 자랑은 돌에 맞음이었습니다(셋째: 돌에 맞은 일) 레위기 24장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이되 돌로 쳐 죽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에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도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어 내쳤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돌에 맞는다는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 사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25절 이하에 보면, 사도바울이 경험하였던 수많은 고난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의 삶은 고난을 요리조리 교묘하게 피하려고 몸부림친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선택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 보면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편하고 안전한 길을 갈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길을 자랑스럽게 걸어가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볼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대신 굶어죽었던 콜베라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왜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을까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그 길을 왜 피하지 않았을까요?

 

비슷한 질문입니다만, 왜 우리는 코로나 19사태가 완전히 종식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교리적으로 볼 때, 몇 달 후가 아니라 몇 년 후에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지옥을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요즘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을 도리어 불편하게 생각하는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유별나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콜베라는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을 위하여 대신 굶어 죽을 수 있었던 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신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의 괴수였던 자신을 위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님이 말씀하신 그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 도리어 자랑이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왜 이 자리에 있습니까? 중직자로서의 체면 때문입니까? 직분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입니까? 아니면 몸에 배인 습관입니까? 하나님은 그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던 우리가 오늘부터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는 예배는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말라기 말씀처럼 다시 성전 문을 닫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결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이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매년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에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비록 올해는 성찬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교회 예배의 그 첫 번째 이유도, 두 번째 이유도, 세 번째 이유도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찬양: 예수 나를 위하여(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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