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200412 대구동산교회 부활주일 오전예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울 9”
(디모데후서 4:6-8)
박 영찬 목사
할렐루야! 지금까지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인데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날마다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영광스러운 금메달은 결승점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선수에게 주어집니다. 출발선에서 다른 선수보다 아무리 빨리 출발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출발도 중요하겠지만, 인생의 결승점인 죽음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인생을 참 잘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사도바울의 인생은 어떠했는지, 그의 죽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로마에 가면 ‘세 분수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사도바울이 60대 중반의 나이에 순교한 자리입니다. 당시의 로마황제였던 네로는 A.D. 64년에 로마에서 있었던 대화재로 인하여 민심이 어수선해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 시켰습니다. 그래서 잠시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서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사도바울을 긴급히 체포하여 로마로 압송시켰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형을 집행 할 때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 안에서가 아니라 인적이 드문 성 밖에서 집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오스티아 항구’로 가는 길 가에서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이라는 영화를 보면, 당시에 참수를 할 때에는 죄수의 머리를 돌기둥 위에 올려놓고 도끼나 긴 칼을 내리쳐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수도원에 가면, 사도바울의 참수할 때 사용된 돌기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돌기둥 위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죽였으면 돌기둥이 한쪽으로 심하게 깍여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순교할 때에 어떠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고,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까요?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의 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런데 6절에,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는 말씀을 볼 때, 이 편지는 순교를 당하기 직전에 로마감옥에서 쓴 편지였습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무려 13권을 썼는데요, 이 디모데후서는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쓴 성경입니다. 마치 모세가 죽기 전에 신명기를 썼듯이, 바울도 순교를 하기 전에 이 서신서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의 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마지막 장인 4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크게 세 가지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죽는 순간까지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첫째: 고난의 삶). 지난 주일에 우리는 고린도후서 11장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흔히들 힘든 일이 찾아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로 많은 위로를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센 고난의 바람이 죽는 순간까지 잠시도 거친 적이 없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전제는 구약시대에 포도주나 독주를 제물 위에 부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안락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자신의 삶을 선한 싸움과 달려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격투기 선수들이 경기 규칙에 따라서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적군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달려갈 길은 약 42키로는 쉼 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 경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마지막까지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머나 먼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데마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누가’ 한 사람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외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올 때에 무엇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까? 13절에 보면,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가죽종이에 쓴 것은 구약성경을 말하기에 쉽게 이해가 됩니다만, 겉옷은 가지고 오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겉옷이란 오늘날 오리털 외투나 코트가 아니라 그냥 담요 같은 것에 구멍을 뚫어서 덮어쓰는 것으로서, 당시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이 입던 겨울옷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사도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이 얼마나 열악하고 추웠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바울은 죽는 순간까지 용서의 삶을 살았습니다(둘째: 용서의 삶).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다 나를 버렸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는 그렇게 외로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로마교회의 형제들이 압비오 광장까지 맞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투옥 되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네로의 폭정이 얼마나 심했던지 아무도 사도바울을 찾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섭섭하고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용서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자신을 목을 치려고 하던 로마군인을 향하여서도, 예수님과 스데반처럼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 저희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였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로 사도바울은 죽는 순간까지 소망의 삶을 살았습니다(셋째: 소망의 삶).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 눈 앞에 현실로 다가오면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어’하고 부정하기도 하고, ‘왜 나만’하면서 분노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죽음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순교의 날짜가 바로 눈앞에 다가 왔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에 대한 소망을 내려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날은 어떤 날입니까? 그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에 ‘의로우신 재판장’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모든 민족을 의로운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날에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죄인들에게는 영원한 지옥형벌을 내리겠지만,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성도들에게는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 날을 기다리면서 소망을 내려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죽는 순간까지 고난의 삶, 용서의 삶, 그리고 소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순교를 앞둔 그 엄청난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의 일에 힘을 썼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58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지금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수고가 누구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까? 주 안에서 즉 예수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마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모든 사람들이 비웃는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 뜬금없이 일어난 황당한 사건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사건임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한두 명의 여자들만이 목격한 사건이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들이 두 눈으로 분명히 목격한 역사적인 사건임을 말씀하였습니다. 심지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도바울도 직접 목격한 사건임을 말씀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과 약속들도 거짓말이 아니고 확실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부활신앙이 사도바울의 힘이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인하여 죽는 순간까지 고난의 삶, 용서의 삶, 그리고 소망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부활이 없었다면, 그런 삶을 흉내도 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누구든지 마지막 결승점에서 1등으로 통과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모습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처럼 고난의 삶, 용서의 삶, 그리고 소망의 삶을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교회는 다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예배는 드리지만,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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