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와 찬양    >    주일설교

주일설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1
2020-04-22 21:32:26
동산
조회수   173

20200419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1”

(로마서 1:18-27)

 

박 영찬 목사

할렐루야! 오늘부터 저는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우리는 이전에 상상도하지 못하였던 많은 변화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답답한 마스크를 쓴 채로, 2미터 이상 떨어져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찬양대도 없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성도들은 벌써 두 달째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방식이나 교회의 시스템보다도 더 간절하게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흔히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아마 자신이 성격이나 습관을 생각해 보면 이 말에 충분히 공감을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격이나 습관보다도 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영적인 모습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수련회나 부흥회에 참여하였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변화됩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때인 줄 믿습니다.

 

혹시 김 대두라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1975년에 그는 도끼로 17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해인 197612월에 사형이 집행되었는데요, 그때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무시무시한 살인마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찬송가 387,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라는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부터 로마서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는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에 있는 대영박물관의 관장이었던 필립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세계를 다 준다 해도 대영박물관과 바꾸지 않겠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친필로 쓴 로마서가 한 장이라도 있다면 이 박물관과 바꾸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귀한 로마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먼저 로마서 1장에서 3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세 명의 탕자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듯이, 로마서에도 그들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이름을 한 번 붙여 보았습니다. 첫 번째 탕자는 열심이 쾌락을 즐긴다고 해서 열락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두 번째 탕자는 열심히 남을 판단한다고 해서 열판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탕자는 열심히 의를 행한다고 해서 열의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이들은 원래 한 아버지의 밑에서 태어나서 자란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참으로 사랑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아들을 비롯한 모든 자녀들이 언제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성 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제공해 주는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성이 얼마나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성의 이름을 에덴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이 세 아들은 유난히 아버지는 말씀을 잘 안 듣는 청개구리 파들이었습니다. 특히 성밖 에는 아주 위험한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절대로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세 아들은 함께 성 밖으로 나가서 강가로 내려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잠깐 강물에 손만 담구고 금방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 명은 강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강물이 깊고 물살이 빠르던지 아무리 힘을 써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니, 한 번도 와보지 못한 낯선 곳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곳은 아버지와 같이 살던 성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주변에는 온통 바위 투성이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무시무시한 야만인들이 사는 오두막만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 명의 탕자들은 뜻을 모아서 함께 행동하였던 것이 아니라,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세 명의 탕자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들입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타락한 세상이고, 야만인들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 첫 번째 탕자인 열락이는 쾌락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쾌락주의자인 열락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쾌락주의자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첫째: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 28절을 보시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다.’고 했습니다. 제가 비유에서 말씀드린 그 열락이는 처음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죄송하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이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살던 본향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눈에 주변에 있는 야만인들이 재미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삶으로 빠져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는 해야 하는 일들도 많이 있었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다 하였고, 하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역시 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누구하나 간섭하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집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도 불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버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볼 때, 오늘날 열심히 쾌락을 즐기는 자들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에는 죄송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대로 하루 이틀 살다보니, 재미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싫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불편해지고,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합니까? 21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기는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예배합니까?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심지어 기어 다니는 동물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즉 세상의 헛되고 헛된 것을 섬기면서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두 번째로 쾌락주의자들은 기준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둘째: 기준이 없음). 집을 짓는 사람이 벽을 쌓을 때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다림줄입니다. 이 다림줄은 벽이 좌로나 우로나 기울었는지 아니면 똑바른지를 가르쳐 주는 기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다림줄이 없다면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그 벽은 점점 기울다가 마침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말씀의 기준이 없이 살아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바르게 살아야지하고 아무리 결심을 합니다만, 실제로는 의로운 길에서 점점 벗어나서 타락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삶의 어떤 열매까지 맺는다고 했습니까? 26절에 보면,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쓴다고 했는데 이것은 여자들끼리 동성애를 한다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남자들도 마찬가지 동성애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9절 이하에 보면 무려 21가지의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32절에 하반절에 보면, 쾌락주의자들은 자기들만 이런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전혀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이 없기 때문입니까? 삶의 기준이나 잣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삶은 기준은 왜 없습니까?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사울 왕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그 저주의 끝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결론>오늘 저는 로마서에 나오는 세 명의 탕자 가운데 열심히 쾌락을 즐기는 열락의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우리는 쾌락주의자하면 어떤 사람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까?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 즉 동성애자나 외도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n번방과 같은 야동사이트나 술, 도박, 게임에 빠진 바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모두다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열락이처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썩어질 우상을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쾌락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1%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원래 쾌락주의자들이었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