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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2
2020-04-26 17:14:29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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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6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2”

 

박 영찬 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저는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만약에 성경전체를 다이아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 한 가운데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서를 보면, 1장에서 3장 사이에 세 명의 탕자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탕자는 열심히 쾌락을 즐긴다고 해서 열락이고, 두 번째 탕자는 열심히 판단한다고 해서 열판이, 세 번째 탕자는 열심히 의를 행한다고 해서 열의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의 탕자는 원래 같은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참으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요, 세 아들과 더불어 모든 자녀들이 아버지가 다스리는 성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각양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개구리 성향이 있는 이 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성 밖에 흐르는 강으로 내려갔습니다. 왜냐하면 멀리서 보기에 그 강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강가에서 잠깐 놀다가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다 강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강물이 깊고 물살이 빠르든지 아무리 노력하여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정신없이 떠내려 가다가 낯선 곳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곳은 너무나 춥고 삭막한 곳이었습니다. 온통 바위와 모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야만인들이 사는 오두막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탕자인 열락이는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처음에는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였습니다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가면서 야만인들이 사는 오두막으로 점점 다가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철학이 자신의 삶의 철학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열락이의 삶의 철학은 너의 인생을 즐겨라.’였습니다. 즉 단 한 번뿐인 인생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 열락이가 오늘날 누구입니까?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바울은 오늘날 쾌락주의자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두 번째는 삶의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 악보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각자 편한 대로 부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사사시대의 사람들처럼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까? 동성애를 비롯하여 21가지의 죄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종착역인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열락이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탕자인 열판이의 모습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열판이의 삶을 한마디로 착각하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자막: 착각하는 삶).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으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부르셨을 때에 아담이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아담은 하나님이 너무나 두려워서 온몸이 벌벌 떨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도 역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낭비한 다음에 아버지를 생각하면 두려웠을 것입니다. 제대로 밥을 먹거나 잠을 자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품을 떠난 열판이도 당연히 아버지만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성품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사랑과 자비가 많은 분이기도 하지만 공의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못 본 척하고 그냥 넘어가시는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토록 열판이를 힘들게 하던 두려움이 어느 날부터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날이 언제였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함께 아버지를 떠났던 열락이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쾌락을 즐기는 모습을 본 바로 그날부터였습니다. 열락이는 열판이가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하였던 온갖 더러운 말들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더러운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열락이를 바라보면서 열판이는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악할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열락이를 향하여 비판을 하면 할수록 아버지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락이에 비하면 자신의 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자신을 칭찬해 주실 줄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열판이는 시간만 있으면 열락이가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오늘은 무슨 못된 말을 하는지, 무슨 못된 행동을 하는지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고 죄를 지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비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남을 판단하는 사람을 향하여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씀했습니까? 먼저 1절에 보면, 그들을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판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크리노인데요, 법정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법정에 가면, 판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서 피의자를 향하여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판단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남의 죄를 보면서 판결의 방망이를 두드리는 열판이와 같은 사람을 성경에서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동생에게 어떤 판결을 내립니까?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삼켜 버린 이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유죄판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맏아들의 목에는 힘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어떤 판결을 내립니까?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는 아들이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무죄판결이었습니다. 또 누가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세리나 창기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판결을 내린 반면에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 아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착각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응하신다고 했습니까?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다른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비교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죄를 범한대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들도 로마서에 나오는 열판이처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흉악한 죄인들을 바라보면서 판결의 방망이를 우리도 두드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들은 죄인 중에서도 아주 상태가 양호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 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본적 있습니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무려 6백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학살시켰던 실무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15년 동안이나 남미 도피생활을 하다가 결국 1960년에 이스라엘 비밀 요원에 의해 체포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재판하는 모습의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웠던 사실은 그렇게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면서 너무나 당당하게 교수대에 섰다고 합니다. 이런 죄인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나는 저런 인간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비교하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못난 사람이요 다 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로마서에 나오는 탕자들 중에 두 번째 탕자인 열판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열판이처럼 자신이 꽤 괜찮은 죄인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장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중에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놀라운 그 은혜로 인하여 여기에 있음을 믿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찬양: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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