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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4
2020-05-10 13:06:36
동산
조회수   202

20200510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4”

(로마서 3:9-18)

 

 

할렐루야! 오늘도 저는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은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입니다. 원래 은혜가 있는 곳에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변화입니다.

 

오늘이 어버이주일인데요, 하늘보다도 더 높고, 바다보다 더 넓은 부모님들의 은혜가 임하는 곳마다 자식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완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를 읽다가 변화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성 어거스틴입니다. 354년에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인 모니카의 무릎 위에서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열일곱 살 때에 타르타고에서 가서 공부를 하면서 방탕한 길로 걷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여자와 14년 동안 동거를 하면서 아이까지 낳았고, 마니교라는 이방종교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는데요, 그 내용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집어서 읽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13-14이었습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로마서 한 절의 말씀을 통하여 그는 모든 방탕한 삶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로마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딱딱하고 어려운 교리서처럼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탕자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주인공이 있습니다. 박 경리씨가 쓴 소설 토지에도 보면, 무려 5백 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만 주인공은 최 치수의 딸, 최 서희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 나오는 탕자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먼저 1장을 보면, 열심히 쾌락을 즐기는 열락이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철학이 너무나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철학은 Enjoy Your Life,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뿐인 인생을 골치 아프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 성 여인처럼,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누구를 두기를 싫어하였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이러한 열락이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다들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2장을 보면, 열심히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열판이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의감에 불타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열락이의 죄를 눈감아 주거나, 못 본 척 하기 않았습니다. 열락의 죄를 볼 때마다 마치 판사처럼 판결의 방망이를 두들겼습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세리나 창기를 정죄하였던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세상 사람들이 열판이를 얼마나 존경하였겠습니까?

 

그런데 3장을 보면, 열심히 의로운 일을 행하는 열의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열락이처럼 쾌락을 즐기지도 않았고, 열판이처럼 남을 판단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찾아왔던 부자 청년처럼,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 얼마든지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들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세상 사람들이 열의를 얼마나 칭찬하였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탕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호세아서에 나오는 탕자이야기에 있어서 그 주인공은 음탕한 여인, 고멜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이야기에서서도 그 주인공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해 버린 둘째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로마서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역시 주인공은 이 세 명의 탕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주인공이었습니까? 그 주인공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사실 우리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즉 그의 마음이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다면, 그렇게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감추려고 하여도 마음에 있는 것이 언젠가는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먼 나라에 떠날 때에도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돈이 없어서 배가 고플 때에도 긴급자금을 송금해 주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돌아올 때 아직도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와 아들 중에 누가 먼저 발견을 하였습니까?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한 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향하여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남자들이 입은 옷은 요즘 성가대 가운처럼 긴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옷을 입고 달려가게 되면 분명히 하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체면이나 권위를 생각하지 않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로마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 아버지는 집을 떠난 세 탕자들을 미워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포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 탕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놀랍게도 로마서 3:25절에 보면, 예수님의 피로써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모든 탕자들의 죄를 담당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잔인하게 죽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상태를 아시기 때문입니다(첫째: 우리의 상태를 아시기 때문.). 9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혹시 우리나라 속담처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로 이해하지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11절에서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무익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목구멍이 열린 무덤과 같다는 것은 사람의 말이 사람을 죽일 만큼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0장에 보면,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15절에서 사람의 발은 어디에 빠르다고 했습니까? 선을 행하는데 빠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데 빠르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부터 말과 행동까지 죄로 오염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결과를 아시기 때문입니다(둘째: 우리의 결과를 아시기에). 죄로 완전히 오염된 인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6절에 보면, 파멸과 고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17절에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3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태와 결과를 아무리 잘 아신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실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형벌을 받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죽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뿐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8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살아온 대가라는 제목의 짧은 글인데요, 프랑스에 사는 93살의 할아버지가 이번에 코로나19에 감염되어서 병원에서 24시간동안 산소공급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 할아버지는 건강을 찾고 퇴원을 하게 되었는데요, 의료계산서를 보고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겨우 24시간 산소를 마시고도 적지 않은 돈을 내는데, 지금까지 93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산소를 마시면서 단 한 푼도 지불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부모님의 놀라운 은혜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더욱더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함으로 날마다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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