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200524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 6”
(로마서 5:1-11)
할렐루야! 혹시 ‘도플갱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너무나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고 도플갱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50장에 보면,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은 영적인 도플갱어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요셉의 형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크게 애굽의 총리가 된 동생 요셉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요셉을 만나기 이전의 삶은 ‘기쁨이 없는 삶’이었다면, 요셉을 만난 이후로는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먼저 용서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에게 감히 고개를 들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죄가 있습니까? 요셉을 미워한 죄, 시기한 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진 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죄, 그것도 부족하여 아버지에게 거짓말 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의 빚을 어떻게 하면 다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평생 빌어도, 평생 울어도, 평생 매를 맞아도 다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45장에 보면, 요셉은 단 한마디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도리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하면서 형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두 번째로 형들은 애굽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만났을 때는 7년 풍년이 끝이 나고, 흉년이 시작된 지 이 년째가 되던 해였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형들이 아무리 많은 양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5년이나 더 흉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었던 바로는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을 비롯한 70여 명의 식구들이 애굽에서 살 수 있도록 초청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 땅에서도 목축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고센 땅에서 살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특권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6장에 보면, 바로는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과 요셉의 형들을 바로의 궁으로 불러서 특별히 대접할 정도로 예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먹을 것을 찾아서 몰려온 난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국민총리의 직계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애굽사람들이 감히 누리지 못하는 특권들을 누리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특권은 총리인 요셉이 직접 그들을 봉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 50장에 보면, 그토록 많은 기쁨 누리면서 살아가던 요셉의 형들이 갑자기 큰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아버지인 야곱의 장례식이 다 끝났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왜 갑자기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이유는 과거에 지은 죄가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죄들은 이미 요셉에게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에 17살이었던 어린 요셉이 형들이 이름을 불러가면서 제발 좀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정하게 못들은 척 하였던 그 장면이 자꾸만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이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에는 꾹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시퍼른 복수의 칼을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최고의 환경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절부절하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 같이 요셉에게 찾아가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러한 형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요셉이 얼마나 어의가 없고,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 가운데 요셉의 형들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난 이후로 세 가지의 기쁨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세 가지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무려 세 번씩이나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까? 첫 번째는 놀라운 용서의 기쁨입니다(첫째: 놀라운 용서의 기쁨). 시편 40:2에 보면, 다윗은 심히 낙심하였다고 고백하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다 헤아려 보니 놀랍게도 열 가지가 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신의 머리털보다도 더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도저히 셀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 다윗만 그렇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로도 많은 죄를 이미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앞으로 지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오십 보, 백보입니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첫 번째 교리가 ‘전적타락’인데요, 100%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는데요,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받게 되었습니까? 따라할까요? “믿음으로.”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입니까?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보혈을 흘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구약의 요셉이 형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주었듯이, 먹보다 더 검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심지어‘기억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사43:25).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기쁨입니다.
두 번째 기쁨은 놀라운 들어감의 기쁨입니다(둘째: 놀라운 들어감의 기쁨). 요셉 시대에 애굽은 아무나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오직 바로 왕이 허락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이 요셉의 가족 전체가 애굽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능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 요셉의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풍요로웠던 애굽보다도 더 들어가기가 어려운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가 누구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요셉의 형들처럼 아무런 공로도 없고 자격도 없지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우리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면서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기쁨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쁨은 특권의 기쁨입니다(셋째: 특권의 기쁨). 우리가 마귀의 자녀였을 때에는 그 어떤 아무특권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들을 누리게 됩니다.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은 돌보심의 특권입니다. 마치 요셉이 요셉의 형들을 돌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산상보훈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도들 가운데는 요셉의 형들처럼 항상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얼굴에 평안함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의 지었던 죄악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기쁨들을 빼앗아 가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확증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기에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저와 여러분들의 확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놀라운 기쁨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처럼 두려움과 불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누리고 있는 모든 기쁨들을 빼앗아 가실질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과거에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평안과 감사 가운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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