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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열두제자이야기 3
2020-06-21 13:49:46
동산
조회수   404

20200621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열두 제자 이야기, 3”

(요한복음 1: 35-42)

 

 

할렐루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시로 내가 지금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무리의 길을 가고 있은 지물어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열두 제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마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사도바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역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그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을 기록하였고, 세 차례의 전도여행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에게 평생토록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는 바나바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원래부터 열심히 복음을 전하던 전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예수님 예자만 들어도 분노의 칼을 휘두르던 복음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이후로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도 두려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을 누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연결시켜 주었습니까? 바나바였습니다. 마침 바나바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서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도 평생토록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는 성격이나 행동에 있어서 결코 반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게바로 바꾸신 다음에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체험을 주시고, 신앙고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회복과 성령 충만한 은혜를 주심으로 연약한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초석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영광입니까?

 

베드로가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결정을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먼저 29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세례를 받기 위하여 자기에게 나아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36절에 보면, 또 다시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사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말을 마음에 새겨들은 두 제자가 결국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두 제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아파트나 차를 구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가장 귀한 것은 집이나 차가 아니라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두 제자 중의 한 명이 바로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베드로에게로 달려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기쁜 소식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을 부어주신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식보다도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42절에 보면, 안드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도가 무엇인지 그 정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란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전도를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전도는 한 영혼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만나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줄 믿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에 그의 인생을 통 채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순서상으로 보면, 항상 베드로의 이름이 먼저 나오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가 된 것은 안드레가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는 한 형제였지만 성격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과 같이 큰일도 많이 하였지만, 실수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내성적이고 섬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큰일에 쓰임 받지는 못하였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사복음서에 모두 다 기록이 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을 특이하게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등장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몇 살인지, 그리고 어디에 사는 알 수는 없지만 그 아이는 평생 그 사건을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잘 것 없는 음식이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에 너무나 귀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제자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다른 사람들이 작게 여기는 것을 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보기에는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주님의 손에 들리면 크게 사용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요한복음 12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를 달려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예루살렘은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유대교로 개종을 한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곧바로 예수님께 여쭈어 보기 전에, 안드레에게 가서 말한 다음에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가서 여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은 왜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가서 의논하지 않고 안드레에게 가서 의논하였을까요? 아마도 베드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안드레는 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생각하는 이방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베드로는 귀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안드레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안드레의 말을 듣고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인과 같은 이방인들까지도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안드레는 언제나 작은 일에 충성함으로 순교하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기초석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그는 열 두 사도의 명단에 이름이 나오지만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그의 이름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머나 먼 러시아로 갔다가 나중에는 그리스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순교를 당할 때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X자 형태의 십자가를 안드레 십자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무리요라는 화가가 훗날 안드레의 순교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는데요,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달린 안드레 옆에 한 소년이 울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 소년이 누군지 아시겠지요? 바로 오병이어를 바친 소년이었습니다. 결국 안드레가 작은 일에 충성한 덕분에 그 소년도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디엘 무디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보스톤에서 구두를 고치는 수선공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생기가 없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킴볼이라는 주일학교 교사가 무디를 귀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망설이가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무디는 미국과 유럽에 큰 부흥을 일으켰던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이사야 60:22).”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어제 우리교회는 임직감사예배를 통하여 33명의 중직자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33명이 안드레와 같이 사역하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베드로처럼 큰일에 충성하는 일꾼도 필요하겠지만, 안드레처럼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도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것들을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이름은 사라질지라도,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일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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