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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열두제자 이야기 9, 도마
2020-08-09 14:07:38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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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열두 제자 이야기9, 도마

(요한복음 20:24- 31)

 

 

할렐루야! 힌두교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인도입니다. 왜냐하면 13억 인구 가운데 88%가 힌두교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남부 지역에 위치한 첸나이라는 도시에 가면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94년에 그 도시에 있는 해변에서 우리나라 조용기 목사님이 집회를 하였을 때에 무려 200만 명의 인파가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들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피듯이, 힌두교 국가에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은 한 사람이 흘린 순교의 피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순교자는 복음을 전하다가 원주민이 던진 창에 찔려 죽었는데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주님을 예배합니다.”그래서 지금도 그의 무덤 위에 세우진 기념교회에 가면 정면에 주님을 예배합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 순교자는 예수님 열 두 제자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신앙고백하면, 마태복음 16:16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생각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라고 부른 제자는 그 제자가 처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 제자의 질문에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만약에 그 제자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그 귀한 말씀도 우리는 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위대한 제자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도마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이 도마에게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 졌습니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그냥 도마라고 나오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여러 곳에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디두모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식 이름이고, 도마는 당시에 통용어였던 아람어식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두모나 도마나 둘 다 이름의 뜻은 같은데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도마는 쌍둥이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도마를 쌍둥이로 기억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의심 많은 제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 가운데 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중고등부 여름수련회에서 조 이름을 정할 때에 도마 조로 정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도마가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부족한 우리에게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제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먼저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마는 10명의 제자들로 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삼일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친히 나타나셨는데 두 눈으로 똑똑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사람도 아니고 무려 열 명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얼마나 확실한 팩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도마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의심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 한 절 때문에 도마는 2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의심 많은 제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처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그 자리에 도마가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제자들이 달려와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도마와 정반대로 할렐루야라고 반응하였을까요?

 

그들도 도마와 똑같이 의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20절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제일 먼저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손과 옆구리를 친히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슬픔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이 비로소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친히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의심이 가득하다는 것을 너무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놀라운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보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보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먹구름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잠시 바람을 바라보는 사이에 의심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열 한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의심의 먹구름은 도마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도마와 같은 자리,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하였겠습니까?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후포에 가면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된 다리가 있습니다. 100% 안전하게 시공된 다리였지만 저도 모르게 난간을 꼭 붙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나 하고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100%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의심이 많은 저와 여러분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세 가지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첫 번째로 우리를 확신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첫째: 확신의 자리).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또 다시 찾아오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심에 빠진 도마를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도마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의심에 가득한 도마의 말을 들으셨을 때에 얼마나 섭섭하셨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열 두 제자 중의 한 명인 도마가 그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속이 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마를 보자마자, ‘네 이놈라고 책망하실 것만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친히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만져보라고 하신 이유는 도마를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연약한 도마를 확신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의심의 자리에서 확신의 자리로 옮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의심의 자리에서 확신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때에도 의심의 자리에서 확신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이 있지만, 여전히 의심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포기하거나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확신의 자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무엇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까?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순간순간 말씀으로 붙들어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교제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둘째: 교제의 자리). 마태복음 18:20에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왜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함께 있는 때에는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이후로 예수님은 연약한 도마를 항상 교제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2에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게 하셨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교제의 자리로 인도하실 때에 그 자리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셋째: 헌신의 자리).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비록 의심 많았던 도마였지만 결코 헌신의 자리, 순교의 자리까지 이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의심도 많고 연약하지만 헌신의 자리까지 인도하여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도마를 우습게 생각한 것처럼,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우습게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마를 보십시오. 의심 많은 도마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확신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다음으로 교제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면서 제자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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