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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거꾸로 사는 사람들. 12
2019-11-22 07:10:31
윤금란
조회수   54

20191117 대구동산교회 추수감사주일

거꾸로 사는 사람들. 12”

(마태복음 7:13-14)

 

 

할렐루야! 터키에 가면 안타키야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의 옛 이름은 안디옥이었는데요, 지금으로 부터 약 2천여 년 전에 이 도시에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외계인처럼 얼굴 생김새나 복장이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 평상시 살아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기적으로 살아가지만, 그들은 거꾸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이타적으로 살아갔습니다. 마치 소금과 빛처럼 자신을 희생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었지만, 그들은 거꾸로 하늘에 쌓아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면서 염려를 하였지만, 그들은 거꾸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조그만한 티를 빼려고 애를 썼지만, 그들은 거꾸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었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다섯 글자로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사셨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과 거꾸로 사셨습니다. 심지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 주신 분이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6201221일에 미국의 플리머스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머나 먼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위험한 바다를 건너거나 험한 산을 넘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구약의 나오미 가족처럼, 지금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거꾸로 지금보다도 먹고 살기가 더 힘든 곳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한문으로 맑을 청자를 써서 청교도라고도 하고, 영어에서 순수한의 뜻을 가진 ‘pure’를 써서 '퓨리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혹독한 추위와 더불어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가운데 3일을 금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습격과 더불어서 괴혈병과 폐렴으로 인하여 매일 두세 명씩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인 1621년 봄이 찾아왔을 때에는 102명 가운데 절반이나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황무지를 개간하고 씨를 뿌렸습니다. 여름에는 수고의 땀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추수의 계절인 가을이 되었을 때에 그들은 옥수수를 비롯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쁨으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지킨 추수감사절에서 한 가지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풍성한 열매보다 더 큰 감사제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냉장고에 쌓여 있는 음식들이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일주일 중에 삼일을 금식해야 했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풍성한 열매보다도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굶어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 열매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만,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감사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좁은 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문이고 또 하나는 넓은 문입니다. 이 두 개의 문중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교회 올 때 정문이 아니라 후문을 이용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라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6:24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먼저 자기를 부인한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육체의 정욕을 다 포기할 뿐만 아니라, 많은 고난을 당해야만 예수님을 따라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넓은 문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왜 쉽고 편안한 넓은 문을 선택하지 않고 대신에 힘들고 험한 좁은 문을 선택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 열매 때문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결국에는 멸망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어떤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영생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정든 고향과 집을 포기한 것입니다. 대신에 주님을 제대로 따라가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가장 큰 감사 제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는 추수 감사주일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무엇이 가장 큰 감사제목입니까? 물론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물질과 건강과 형통의 열매도 귀한 감사제목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추수를 마치고 수장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처럼, 우리들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면 이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감사제목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결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이 험한 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여 어리석다고 조롱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영원한 축복,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땅에서는 상이 없지만,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하박국 선지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으로 인하여 그의 몸이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고백하였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사와 기쁨인 줄 믿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감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열매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할지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장차 받을 하늘의 큰 상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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